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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컬럼 (유양진 목사) - 내가 살 수 있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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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리안저널 댓글 0건 조회 79회 작성일 19-10-04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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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어느 지방에서 목회할 때 새벽 5시 경, 아내의 소란으로 새벽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격한 냄새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냄새에 둔감해서 그런지 속이 약간 매스꺼울 정도였으나 아내는 구토까지 했습니다. 사랑이도 짖고 한바탕 소란을 피웠습니다. 개스가 새어 나왔나 싶어 문이란 문은 다 열어놓고 개스 캄파니에 전화해서 사람을 불렀더니 집에 도착한 그 직원의 첫 마디는 ‘스컹크의 냄새’라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의 구조는 바닥에서 떠 있는 구조였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스컹크가 방귀 뀐 냄새를 맡아보았습니다.
강철왕 카네기가 옐로우스톤 팍에 다녀 온 글을 언젠가 읽은 적이 있었는데 동물원에서 회색 곰이 밥을 먹는 광경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어떤 동물도 회색 곰 곁에 오지 못했으나 유일하게 스컹크만은 곰과 함께 밥을 먹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호기심에 물어보았더니, 언젠가 회색 곰이 밥을 먹는데 스컹크가 다가와서 자기 밥을 먹을 때 주먹으로 한방 쳤더니 스컹크가 쏟아낸 지독한 냄새를 맛보고 다시는 스컹크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본 카네기는 곰이 사람보다 훨씬 지혜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몰랐지만 한번 당하고 난 뒤 어떤 대가를 치러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미련하다고 하는 곰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모든 생물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능적으로 뛰어난 존재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이래 소화제를 옆에 두고 음식을 먹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합니다.
인간들은 내가 ‘이것을’하면, ‘이 말을’ 하면, ‘이 행동을’ 취하면 어떤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행하는 미련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상대편에 의해 졸도하기도 하고, 심장마비 등을 초래합니다. 화를 참지 못해 밥상을 뒤 엎는다든지, 가재도구를 부순다든지, 머리로 땅바닥을 찧는 행동을 취합니다. 결국 자신만 손해 보게 되어 있습니다.
목회했던 교회에 젊은 부부집사님이 있었는데 어느 주일 날 남편집사가 오른 쪽 팔에 깁스를 하고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성가대 지휘자였는데 팔이 부러졌으니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날은 지휘자 없이 성가대 찬양을 했습니다. 예배 후에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는데 아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화를 참지 못하고 벽을 쳤는데 손목이 부러졌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평소 남편의 화를 돋구는 재잘거림이 좀 심했는데 그렇다고 시멘트로 된 벽(스컹크)을 치면 손목이 부러진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곰보다 미련하여 큰 부상을 입고 고생하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담배, 술, 마약 그리고 ‘지나침’은 모두가 ‘스컹크’인데 우리는 미련하게도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산에 ‘남광일시영아원’이란 시설이 있었습니다.(지금은 모르지만) 그때 중고등부 학생들을 데리고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신생아로부터 5살 까지 버려진 아이들을 수용한 곳이었습습니다. 이들이 자라 6살이 되면 ‘고아원’으로 보내지는 그런 기관이었습니다. 직원의 안내로 신생아들이 누워 있는 방으로 갔습니다. 방문한 학생들의 숫자가 많아서 임원들만 데리고 직원들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어느 한 곳의 침대에 보기에 민망할 정도의 기형아가 뉘어져 있었습니다. 눈은 없고 눈썹만 있었는데 눈썹 하나는 위쪽에 하나는 아래 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코구멍 하나에 입의 위치도 정상이 아닌데다 귀도 한쪽이 없는 애기가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물론 손과 발도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산모가 술과 담배 그리고 마약중독자라 했습니다. 술, 담배 마약은 그에게 있어서 ‘스컹크’였습니다. 복중에 태아가 있었으나 ‘뭐, 어때?’ 하다가 결국 보복을 당함으로 기형아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때 나도 충격을 받았지만 같이 들어간 학생회 임원들의 충격은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엔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가인이 자신이 땅에서 거둔 곡식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쳤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갓 태어난 가장 살찌고 부드러운 새끼 양을 골라 바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대해 가인은 크게 화를 내었고 안색은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왜 어두운 얼굴로 화를 내느냐? 네가 옳은 일을 행하면 당연히 너의 제물을 받을 것이며 네가 그릇된 일을 행하면 죄가 너의 집 입구에 엎드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것이다. 네가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그 후에 가인은 아벨을 밖으로 유인해서 쳐죽임으로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던 것입니다.(창4:1-8) ‘죄가 문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언젠가 내가 죄를 지음으로 내가 남긴 그 흔적이 내 집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린 그때 ‘아, 바로 너였구나!’ 하고 뼈아픈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카운트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인들 중 정말 무서운 사람은 주변이 불안해야 편해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큰 하자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장과정에 반드시 큰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들은 겉은 멀쩡하게 보이지만 속엔 피가 마르고 뼈가 녹아 내릴 뿐 아니라 심장을 쪼이게 만들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내가 나를 위하는 길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마5:44) 그리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했으나 예수님은 오히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동행하라’고 하셨습니다.(마5:38-42) 또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도 하셨습니다.(마18:22) 이 모든 말씀은 ‘저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병통치 약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어떤 목사님을 모시고 집회를 했는데 그날 설교제목은 ‘원수를 사랑하라’였습니다. 그 목사님의 원수사랑에 대한 재해석이었습니다. 교리와 이론적인 설교보다 간증설교였습니다. 장로가 한 달만 쓰고 돌려드린다면서 돈을 빌리러 왔기에 목사와 장로간에 돈을 거래한다는 것이 곤혹스러웠으나 장로님의 딱한 사정을 모른체 할 수 없어서 빌려 주었습니다. 갚기로 약속한 한달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달이 지나갔습니다. 그 빌려준 돈 때문에 마음 씀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음에 대해 말 한 마디 없어 화도나고 민망하기도 하고 그래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장로에게 빌려간 돈을 왜 갚지 않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그 장로가 보인 반응은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돈은 우리가 드린 돈인데 뭘 달라고 하십니까?” 그때부터 그 장로를 볼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새벽제단에 앉아 그 장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불쌍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돈이 필요했으면 장로가 목사의 돈을 떼어 먹을까?’ 그때 크게 깨달은 것은 “저런 장로를 사랑은 몰라도 그를 위해 기도는 할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수사랑은 원수를 위한 기도로 재해석하게 되었다는 간증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뉴월 잔디밭에 앉아 있는 자들을 향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실천하신 곳은 갈보리 언덕이었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시기 전에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를 본 받은 자가 곧 스데반이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외친 기도는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였습니다.(행7:59-60) 그는 죽어가면서 혹시 내가 저들에게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닐까 속죄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스데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인격화 된 하나님이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건강하고 유쾌하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에 대한 이해와 용서와 사랑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유양진목사
909-635-5515
yooy00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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